“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 14:6), 무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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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석

요한복음 14:6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다”라고 한다. 많은 기독교인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예수만 구원의 길이라고 하며, 나아가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고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런 의미일까? 이 구절의 의미를 역사적 상황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이 문서의 전통을 전승받고 편집하고 기록한 요한 공동체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대개 공통된 의견은 요한 공동체는 서기 80-100년 가까이 유대교에서 축출된 소규모 집단으로서 박해와 신앙노선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왜나하면, 유대교내에서 예수를 구세주라 전하는 것은 곧 그들이 박해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요한 공동체는 모공동체인 유대교와의 경쟁내지 유대교와의 싸움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상황하에서 요한복음의 논조와 강렬한 이분법적인 어휘들 (예: 빛과 어두움)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힘없고 쓰러지기 직전의 이 공동체에 힘을 불어넣고 유대교와 대항하여 생존하고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서 요한복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서에 나타나는 많은 그런 확약의 구절 (14:6을 포함하여)은 공동체를 살리려고 하는 말씀이다. 말씀의 수취자가 사회적 약자라는 것이다. 내부 공동체가 수취자라는 것이다. 예수가 길이고 진리라는 것을 다른 종교나 다른 민족에게 적용시키기위해 씌어지지 않았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은 거꾸로가 되어 힘있는 기독교가 힘없는 다른 종교나 민족에게 이 말씀을 강요하는 것은 원래의 취지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할까?

그 다름으로 살펴볼 것은 과연 “길” “진리” “생명”이 무엇인가를 다각도로 살펴봐야 한다. 성서 해석방법에 따라 다양한 의견과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간단한 예를 들면, 요한복음 전체를 문학작품으로 살펴 “길” “진리” “생명”이 어떻게 쓰이었는가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이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다. “길”은 여러가지를 상정한다. 그 중의 하나가 예수의 삶이 길이 될 수 있다. 그의 삶속에 약자를 귀히 여기고 소원한 신인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그런 삶의 메시지를 듣고 진정한 “해방”이나 “자유”의 길 – 인종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똑같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그의 삶의 방식과 철학이 곧 그 분이 보여준 길이라는 것이다. 사실 요한복음서에 보면 최초의 제자는 사마리아성 우물가에서 만난 이름없는 여인이다. 그녀는 이방인이자 여인이요 사회경제적 약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에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보여준 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는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자기의 사명을 적시한다. 자기는 하나님이 보낸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다. 생명의 풍성은 종합적인 개념이다. 정치 사회 경제 심리 신학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약자가 일어나고 정의가 샘솟는 것이 생명의 풍성이다. 그렇게 하기위해서 필요한 것은 건전한 생명신학과 윤리를 가져야 가능한 것이다. 예수는 자기의 육체와 피가 음식과 음료라고 하며 자기의 희생을 강조한다. 그것이 길이고 하나님이 보여준 길을 예수가 보여주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를 믿지 않아도 자기의 일을 보고 하나님이 보낸 자라는 것을 믿어라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보라는 것이다. 요즘은 일은 없고 이름만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일이 생명의 풍성함을 가져오는 일인가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때 요한 14:6절은 무기가 되어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도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길이라고 할 때, 그 의미의 깊음과 넓음을 반드시 헤아려 사용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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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석 교수의 영문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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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지붕으로 땅을 이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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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땅만 보고 산다. 그러나 가끔씩 하늘을 보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이다.  산을 올라야 한다. 부질없는 아래를 보며 초연하는 법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늘만 보고 산다. 이 땅을 거저 지나가는 나그네의 삶 정도로 생각하고 무책임하게 살거나 염세적 허무적으로 보내는 이도 있다. 이것도 좋은 태도는 아니다. 땅을 부정하는 삶은 인간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까? 하늘을 지붕으로 삼고 땅을 이불 삼고 사는 이방인처럼 사는 것이다. 이 땅에 기거하면서 이 땅 바깥에서 내려다볼 줄 아는 시각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 깊이 뿌리 박아 영원히 살 것처럼 살다 보면 자기 밖에 모른다. 욕심이 끝이 없다. 자기 안의 세계에 갇히고 다른 사람은 정복이나 통제의 대상으로 보이고 이 땅은 그저 자기의 영원한 안식처로 여겨진다. 그러나 거기에 영원한 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속고 사는 것이다. 이 땅에서 자기 세계 안에 갇힌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틀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이 들어 올 틈이 없다. 이것은 마치 힘 센 자는 약한 자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약한 자의 아픔과 괴로움을 몸소 겪어 보지 못한 자가 그러한 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동참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대각의 순간과 기회가 필요하다. 교육이다. 보통의 학교 교육이 아닌 특별한 깨달음의 산실이 필요하다. 이런 대각이 없는 상황에서 나와 다른 것은 이단이고 삼단이고 척결의 대상이다. 때로는 무지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때로는 교만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엄연한 사실을 모르고 남을 짓누른 경우는 예를 들면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가 교회로 부터 당한 수모와 압박일 것이다. 우리 인간의 일반적 지각과 경험으로 보면 분명히 태양이 지구를 돈다. 그러니,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정신 나간  사람이 하는 말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은 우리의 주장이나 생각과 관계없이 엄연한 사실이다. 지구 바깥에서 관찰하면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이 보인다. 꼭 지구를 떠나야 보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관점의 변화를 가져와야 사실의 직시가 가능하다.

이런 관점의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듯한 이방인의 자세와 삶을 살 필요가 있다. 내가 어떤 곳에 속하고 거기에 매이다보면 생각과 관점이 또한 매인다. 알고 맹종하기도 하고 모르고 끌려가기도 한다. 결과는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왜냐하면 어떤 집단적 이익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기에. 오히려 남이나 다른 집단에 해가 되기도 한다. 이방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 자유롭다. 이런 자유로운 자들의 소리를 예언의 소리로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실을 말할 확률이 높다. 사회의 약자들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그렇다. 그들은 진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안락한 침실이 없는 자들의 삶은 그야말로 하늘이 지붕이고 땅이 이불이다. 그런 낮은 자, 초연의 이방인이야말로 이 땅의 예언적 목소리이다. 그들은 단순히 보호받아야 할 불쌍한 자가 아니다. 물론 모든 이방인이나 약자가 똑같이 느끼고 예언적인 목소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럴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지구가 좁게 느껴진 적이 없을 것이다. 흔히들 너는 어디 출신이냐를 많이 묻는다. 여기 미국도 마찬가지다. 왜 묻느냐? 만나자마자 그걸 왜 먼저 묻느냐?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물론 질문자체는 중립적이고 좋은 질문일 수 있지만 질문하는 자의 의도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깊이 따져보면 앞으로 힘겨루기의 전초천이다. 국가배경, 종교와 문화, 가문, 재산, 지위 등을 가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는 지구에서 왔다. 지구 마을이다. 내가 크고 네가 작다는 비교는 지구 바깥에서 보면 우물안 개구리이다. 의미없다.

그러니 이 땅을 살 때 땅에 충실하게 살며, 땅의 정직함과 묵묵함을 받들어 살아야 하나 땅에만 목숨 걸지 말고, 다시 말하면 땅만 전부라고 생각하며 자기의 주장이나 집단에 목 매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을 보는 여유, 나를 초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늘의 시각을 가져라. 그것이 하늘을 지붕으로 땅을 이불삼아 사는 나그네의 자세, 이방인 같은 삶의 자세이다. 이런 자는 열린 마음이 되리라.

도덕경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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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석

서문

번역에 몇 가지 고려한 사항이 있다. 판본으로서 왕필본을 기본으로 번역을 하고 본문비평적인 판본비교는 하지 않는다. 왕필본을 기준으로 평이한 번역을 하되 원래의 뜻을 존중하기로 하였다.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가능한한 원문의 뜻을 살리려 하되 무리하게 거기 매달리는 것도 의미가 없다. 결국은 현대적 의미의 소통을 강조한 번역이다.

몇 가지 중요한 단어의 번역에 대해서 언급해야겠다. “도”의 개념이 문제이다. “도”를 “도”로 번역하면 우리의 삶과 거리가 있는 것 같아 “길”이라 번역한다. “도”라 하면 신선의 도, 이 세상을 초월한 어떤 영원한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차라리 “길”이나 “원리”가 더 자연스런 의미일 것이다. 도덕경에서 도는 초월적인 영원한 도, 서양적인 개념하에서의 형이상학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길”이라 하면 길은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길, 바람직한 길을 의미한다. 필자가 이해하는 도덕경의 “도”는 결코 이분법적 구도에 의한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든 통하는 (꼭히 여기와 저기를 구분하지 않음) 원리, 삶의 뿌리, 살아가는 길 등을 의미한다. 자연의 길이나 세상의 길이 통한다는 것이고, 이 세상을 확장한 어디든 통하는 길이다. 흔히 서구적 번역에서 보면, 도덕경 1장 1절을 번역할 때, 다음과 같이 나온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The way that can be told is not the permanent truth).” 이것은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심각한 오류이다. 오히려 원문의 뜻은 “도는 도이나 항상 같은 도는 아니다”에 가깝다. 즉, 도는 고정된 영원한 개념이 아니라 변하는 것이며 세상 속에 현현하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나 원리라 할 것이다. 도덕경의 도의 형의상학적 개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따라야 할 현실적, 자연적, 윤리적, 개인적, 공동체적 길을 말한다. 한마디로 하면, 자연처럼 사는 길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런 것을 가지고 심화된 철학으로 발전시키지만 때로는 그런 학문이 원래의 지혜의 뜻과 의미를 퇴색시키거나 변질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는 여타 통속적인 개념의 도와 구분하기위해 “길”이나 “순리” 혹은 “큰 뜻” 등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성인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성인이라 하면 속세와 구분된 거룩한 사람, 혹은 도를 깨친 완벽한 사람이란 뜻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현자”라고 주로 번역하고 가끔은 “길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바랄 欲(욕)을 욕심 慾(욕)과 구분하기로 한다. 물론 전자의 “욕”도 바라다는 것과 욕심을 가진다의 두가지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1장에 등장하는 “상무욕”과 “상유욕”에서 “욕”은 욕심이 아니고 바란다는 뜻이다 (“상무욕”은 34장에도 나옴). 상무욕은 “무상심” (고정된 생각을 갖지 않음)과 비슷한 의미이다. 상무욕과 상유욕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이다. “욕” – 바란다는 뜻 – 자체가 나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욕”의 균형을 말한다. 즉, 우리가 소망하고 바라는 마음은 있어야 하나 (상유욕), 또한 나의 마음의 고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무욕). 바라는 것을 내 위주로, 자연적 순리에 어긋나게 하지 마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욕심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하는 번역은 원문과 좀 거리가 있지 않나 한다. 그래서 “바라다”라는 원래의 단어 欲을 살리려 하는 것이다. 물론, 욕심을 없앤다는 뜻이 도덕경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욕불욕”이다 (참고 64장). 욕불욕은 “불욕” (욕심을 버림)을 바라라 이다. 즉, 욕심을 내지마라이다. 여기서 불욕은 욕의 목적어이다. 그러므로 대개 영어 번역이나 한국어 번역에서 모든 “욕”을 욕심으로 번역한 것은 문제가 있다. 도덕경 1장에서 말하는 “욕”은 욕심의 뜻이 아니다. 이러한 차이를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욕”의 양립성 내지 균형을 강조하는 노자의 사상은 서양철학이 간과하고 있는 위대한 발견이라 하겠다.

 

도덕경의 핵심

도덕경은 삶의 길을 제시하는 지혜서로 다분히 역설적이며 힘과 권력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하게 깔려있다. 세상을 거꾸로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언어상징과 수사가 도전적이고 기존의 틀을 해체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런 해체의 의미에서 현대의 해체주의 (Deconstrucitive approach) 철학자인 데리다 (Jacques Derrida)가 생각난다. 노자와 비슷한 맥락에서 데리다는 현대사회의 정치권력과 자본주의의 결합, 절대 권력과 획일성, 제국주의적 모순과 각종 차별, 불평등의 사회경제 문화 속에서 생산되는 문학을 신랄하게 비평하며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노자가 꿈꾸는 세상도 바로 그런 것이다. 즉, 모순된 인간사회 속에서 어떻게 각 개인과 사회, 국가가 “순리”대로 살 것인가? 그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책이다. 노자가 제시하는 답은 자연의 길이다. 그럼 자연의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과 먼지와 같이 되라 이다. 바라되 내 뜻대로 바라지 말라 이다. 이런 삶의 원리에 따라 사는 모든 생각, 태도, 행위가 바로 도덕경에서 말하는 “덕”이다. 도와 덕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고 하는 말과 비슷하다. 좋은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 좋은 열매를 맺는 이치와 같다.  자연의 길을 따라 사는 것, 물과 먼지처럼 산다는 것은 곧 나를 아는 자이고, 그런 사람은 지혜자이다. 그런 사람은 또 자기를 이기는 자이며, 물과 같이 부드러움을 지키는 자이다. 위의 이런 내용의 핵심을 도덕경의 구절로 뽑아 아래에 적어본다. 아래 각 구절은 여러 다른 장에서 왔다.

 

지혜 (밝음)에 대해서: 자지자명  / 견소왈명 / 동기진)

  1. 자기를 아는 자는 밝은 자다 (자지자명)
  2. 작은 것을 보는 자가 밝은 자다 (견소왈명)
  3. 먼지와 하나가 되라 (동기진)

 

강함에 대해서: 자승자강 / 수유왈강 / 상선약수

  1. 자기를 이기는 자가 강한 자다 (자승자강)
  2. 부드러움을 지키는 자가 강한 자다 (수유왈강)
  3. 물은 가장 좋은 것이다 (상선약수)

 

왜 도덕경인가?

도덕경은 노자가 쓴 것으로 (비록 후대 편집과정을 거치며 다소변동이 있다하더라도)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분석하는 혜안을 가지고 있다. 노자는 인간 내면의 이중성을 본다. 하나는 “길을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능력을 저해하는 인간의 한계와 약점을 인정하고 이를 직시한다. 그러니 그 길이 잘 찾아지지 않고 찾아도 따라 가기가 쉽지 않다.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꺼번에 보는 것이야 말로 우리 인간의 실존을 가장 잘 이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노자가 말하는 길이란 어디든 통하는 길이다. 내 안과 밖, 사회와 우주에 까지. 그러니 건전한 사상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를 영원과 분리하지 않는 것, 나와 이웃을 분리하지 않는 것, 나의 가능성과 한계를 분리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사상이다. 그래서 나는 도덕경을 좋아한다.

 

도덕경과 성서의 간단한 비교

도덕경과 성서는 우연히도 기록시기적으로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대부분은 기원전 6세기에 기록된 것이 많다. 이 시기는 유다가 바빌론 제국에 멸망하여 지도자들과 일부가 바빌론 유배생활을 했던 시기다. 나라가 멸망하고 피난길에 오르면 지나간 역사를 다시 살피며 반성하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다짐을 한다. 그런 과정에서 전승되어오던 이스라엘 선조들의 종교체험을 재정리하게 되면서 토라법전과 역사가 편집 정리되고, 예언서와 지혜서가 기록된다. 도덕경의 기록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노자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5-6세기까지 간다. 노자의 시대도 정치사회적으로 격동하는 때이니 새로운 인간상,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구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 기원전 5-6세기는 재미있는 시기다.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게 만든 사상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소크라테스와 공자도 이 시대 사람들이다. 도덕경과 성서는 분명 다른 책이다. 역사적 상황이 다르고 문서집필 편집과정 등이 다르며 사상 또한 다르다. 그러나, 도덕경과 성서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사상이 있다. 첫째는 하늘의 길을 따르라이다. 구약성서에서 여호와는 거룩하고, 공의와 사랑, 자비로 나라를 다스리니 그 길을 따르라 한다. 도덕경에서는 하느님을 말하지 않지만 하늘의 길, 자연의 길, 순리를 따르라 한다. 성서나 도덕경 둘 다 인간으로서 가야 할, 따라야 할 바른 길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것이다.

둘째로, 겸손과 낮음을 강조하는 삶의 태도가 비슷하다. 구약성서에서 인간과 하늘은 다르므로 겸손할 것과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고 절대자에 의존하라 한다. 이것은 도덕경의 인간한계와 약점을 인지하며 강조하는 것과 비슷하다. 낮아짐에 대해선 신약성서 요한복음에 보면 하늘의 로고스가 인간의 몸을 입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하늘의 낮아짐을 강조하는 것으로 희생과 사랑의 삶을 살라는 메시지다. 도덕경에서 물은 바로 낮음을 강조하는 것이고, 먼지는 겸손을 상징하는 것이다.

셋째로, 삶의 완전성 (wholeness)을 강조한다. 인간의 내면과 밖을 구분하지 않고, 삶의 모든 영역이 완전하게 되어야 한다. 종교와 정치, 경제가 구분되지 않으며 시공이 구분되지않는 삶의 완결성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성서와 도덕경에 흐르는 특징적 사상이다.

*참고: 부록에 영어 새번역도 첨부하였다.

성서에 던지는 물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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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던지는 물음표

문화 비평적 성서 해석과 오늘 (동연, 2014) 김영석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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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삶의 아련한 추억은 저만치 수줍은 듯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르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어둔 밤의 벽처럼 우두커니 나를 응시한다. 다 지난 일이다. 삶은 선물이다. 오늘을 감사의 마지막으로 살고 내일을 희망의 끈으로 기다리고 싶다. 어제를 잊지 않되 머물지 않으려 한다. 복잡한 심사구나.

91년 한국을 떠날 때는 LG전자의 싱싱한 해외주재원으로 중남미 지역 특히, 파나마와 중미, 카리브해 그리고 미국 마이애미 등지에서 해외시장 개척의 선봉이 되어 동분서주 하던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러다 전전반측 끝에 가보지 않은 길, 신학여정을 하기로 하였다. 주위의 반대와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 그러나 많은 이들의 지원과 도움으로 무사히 학위를 마치고 미국의 대학교에서 가르친 지가 10년이 되어 간다.

미국에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녹녹하지 않다. 가끔씩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질문을 한다. 나름 의미 있는 생각과 책을 쓰고 또 쓰지만 늘 가슴 한 켠에 자리잡은 영원한 외로움이 있다. 그것은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것도 아니고 편한 고향을 그리는 향수병도 아니다. 아마 고독을 필요로 하는 직업에다 고독을 벗삼아 지내다 보니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던 중, 이번에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나의 작은 책이 나오게 되어 너무 기쁘다.  특히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실장은 처음부터 다리를 놓아주고 격려와 조언을 해 주었다. 책 추천사까지 써 주셨으니 뭐라 감사해야 할 지… 출판을 허락해준 동연의 김영호 대표와 정성스레 편집을 해준 조영균 편집장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은 성서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다룬다. 성서는 무엇이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 수많은 해석과 말 많은 성서가 오늘 우리들의 삶과 세상, 나아가 인류공동체의 현안을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어떤 건전한 시사점을 주는가, 아니면 효력 없는 위험한 구시대의 유물인가? 이 책은 이런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썼으며 필자의 고민과 사색이 녹아 있다. 성서에 관심 있는 비평적 크리스천, 대학생, 일반대중, 성서를 좀 더 있는 그대로 보기 원하는 타 종교 지도자들과 신도들도 읽었으면 한다.

서론에서 “문화 비평적 성서 해석”이란 개념을 소개하고, 1부에서 그런 해석을 위한 몇 가지 전제조건을 다룬다. 예를 들면, 성서와 하느님의 말씀은 같은가? 2부에서는 문화 비평적 성서 해석의 실재로서 성서에 물음표를 던지며 익숙한 해석을 뒤집기도 하고 도전하며 새롭게 읽어본다. 3부에선 문화 비평적 성서 해석의 시각에서 오늘의 인간상과 당면과제를 탐색해본다.

이 작은 책을 통하여 독자 스스로 성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성서는 결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독자가 해석할 뿐이다. 그렇다고 어떤 특별한 사람들이나 조직이 해석을 독점하는 애장품이거나 남을 공격하는 오만한 무기가 될 수 없다. 오직 날카로운 비평을 통하여 재해석되고 거듭나야 하는,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그런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독자의 비평의 눈이 중요하다. 비평 없이 읽는 책은 그저 오락이거나 자기 만족이거나 해로운 독이 될 수 있다.

나는 노자의 도덕경 71장을 좋아하며 우리 삶의 자세에 대해 한 수 배운다.

知不知上: “알지 못함을 아는 것이 가장 좋다.”

즉, 다 알 수 없다는 존재적 겸손으로 돌아가란 말이다. 늘 열린 마음으로 나 보다 더 큰 세상을 품고 모든 것에 배움을 얻는 자세가 필요하다.

不知知病 夫唯病病 是以不病: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병이다. 오직 병을 병으로 여기면 병이 되지 않는다.”

자기의 부족함을 아는 자는 병에 걸리지 않는다.

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성인 즉, 지혜자는 병을 병으로 여기기 때문에 병이 되지 않는다.”

이 한 권의 책으로 무엇을 얼마나 말할 수 있으랴. 아쉬움도 있고 부족함도 많다. 나는 언제나처럼 이곳에서 나의 길을 가려 한다, “저 광야를 가고 있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Suta Nipata에서).

도덕경에서 본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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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물은 가장 좋은 것이다
물은 불을 이긴다
물은 전쟁이 일어나도 끝까지 남는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물은 부서지고 공격을 당해도 완전히 부서지지 않는다
물은 부드러워 부서져도 원상 회복한다
아무리 부수고 찔러도 항상 그 자리에
낮은 데로 임하며 생명을 살찌게 한다
단단한 것은 부러지고 부서지며
바위가 부서지면 날카로운 무기만 남는다
너무 단단하면 부러지고 회복 못하는 것
부드러움은 삶의 특징, 단단한 것은 죽음의 징조
부드러운 것은 늘 움직이고 흐른다는 것
단단한 것은 변화를 저항하고 흐르지 않는 것
사람이 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 같이 부드러워 잘 부서지나 여전하고 강한 마음
그런 부드러운 자는 마음이 부서지는 자
강퍅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깨뜨리고
세상의 온갖 소식에 마음 아파 마음을 부수는 자
가장 낮은 위치에 있어도 가장 약한 위치에 있어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는 부서진 영혼, 상한 마음
강한 자 어디 있으랴
자기의 약함을 지키고 자기의 작음을 아는 자
하느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깨뜨리고 부수는 자
결코 망하지 않으리
이것이 메타노이아(metanoia)의 삶 – 깨어짐으로 강하여지는 비밀
부서지고 깨어질 때 하나님이 보이고 이웃이 보이고
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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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공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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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높고 크다 해도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의 전제군주나 독재자와 같은 것이다.
하늘이 높고 위대한 것은 단순히 높고 크기때문이 아니고
그 공평함에 있다.
하늘은 선인 악인 차별 않는다.
비와 햇빛은 모두에게 골고루 내린다.
사람이 자기 신만이 최고라고 하거나
자기들만 축복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의 공평함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평성의 하늘도 결국은
도를 따른다.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길, 원리를 따라 한다.
도덕경에서 그것을 천법도라 한다.
天法道. 하늘이 도를 따른다.
그 길, 원리, 도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도법자연” 이다. 道法自然.
도 혹은 길이란 결국 거창한 것이 아니고
자연을 따른다는 말이다
그것을 닮아 산다는 것이다.
그럼 자연을 닮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표적인 것이 물이다.
물을 관찰하고 배우라.
물처럼!
도덕경에 나오는 여러가지 자연의 메타포가 있다.
그것을 공부하라.

땅을 본받고 (人法地)

기본

도덕경에 인법지 (人法地)가 나온다. 사람은 땅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순서적으로 사람은 땅과 가장 친하게 되어 있다. 우선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아야 한다. 육체는 그것을 필요로 한다. 달리 방도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쉬고 잠 잘 때 가장 낮은 곳, 땅의 위치를 선호한다. 나무 위에서 혹은 공중에서 쉬고 잘 수가 없다. 땅은 내가 매일 걷고 뛰고 하는 장소다. 땅은 우리가 집을 짓고 사는 기초이다. 이렇듯 땅은 우리 생명, 삶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정성과 희생으로 기르듯 땅이란 우리에게 그런 존재이다. 수 천년, 수 억년 인간의 밑바닥에서 인간의 삶을 지탱하여 주었으며 수없는 짓밟힘과 학대 속에서도 그 묵직한 생명의 기초의 책임을 마다 하지 않았다. 땅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땅과 관련 없는 것이 없다. 모든 동식물은 땅에서 나는 것을 기초로 살게 되어 있다. 오늘날 땅의 소중함을 알고 지구의 날을 제정하고 잘 보존하려 노력하는 것은 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런데 도덕경에서 땅을 따라 살아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땅의 묵직함, 침묵, 희생, 인고, 침착과 차분함을 배우라는 것이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사람도 땅의 겸손, 땅에 의지해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의 겸손을 가지라는 것이다. 마음을 위에 두지 말고 항상 낮은 곳에 두라는 말이다.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라”는 말이다.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虛其心 實其腹 (허기심 실기복). 비워야 할 것은 마음이다. 비워야 채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채워야 할 것은 배라고 하는 말은 육체의 기본적 욕구를 만족시키라는 것이다. 내가 배 고프면 다른 사람도 배 고프다는 것을 알고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배를 채우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를 채우는데는 사실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 이것이 안 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많은 경우에 문제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욕구에 만족하지 않고 마음을 불리고 헛되이 채우려하므로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허기심 실기복이라 한다. 얼마나 실질적인 충고인가.

그 다음으로 땅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정직성과 성실성이다. 땅은 속이지 않는다. 팥 심으면 팥나고 콩 심으면 콩난다. 농부가 노력한 만큼 소득이 있다. 물론 농부가 다 하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햇빛과 바람, 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농부가 일하지 않는한 원하는 작물은 얻을 수가 없다. 땅은 차별하지 않고 심겨진 것을 받아 들이고 그 성장과 발육을 책임진다. 땅은 거름이 있어야 된다. 땅이 깨끗한 모래 같으면 농작물이 자랄 수 없다. 땅이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 그 땅은 부드럽고 퇴비와 온갖 것이 적당히 배합되어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땅의 기질, 희생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땅은 우리의 성급함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아무리 급해도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땅을 딛고 걸어가야 한다. 이것은 바로 침착함을 유지하여 인생의 순간 순간을 냉정하고 침착하게 한 걸음씩 뚜벅 뚜벅 걸어가라는 것이다. 도덕경에 千里之行始於足下 (천리지행시어족하)가 있다. 천리 길도 바로 내 발 밑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쉽고도 명쾌한가? 이것을 무시하고 날아가려 하는 것은 바로 땅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人法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도덕경에서 이 말 다음에 지법천(地法天)이 나온다. 즉, 땅은 하늘을 따른다. 아, 기막힌 반전이다. 땅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 같았다. 땅만 바라보고 살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농사만 봐도 알 수 있다. 농사가 잘 되기 위해서 하늘에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 비가 오지 않으면 도리가 없다. 햇빛이 없으면 농사가 안 된다. 그러니 땅이 땅으로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땅의 자립이 불가능하다. 유아독존이 불가능하다. 혼자 존재할 수가 없다는 깨달음이다. 나보다 더 큰 대상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과 같다.

땅에서 하늘을 바라다 보는 것은 무한한 희망의 에너지이다. 하늘의 창대함을 의지하며 맑은 생각을 갖는다는 것, 축복이다. 너무나 먼, 닿을 수 없는 그 별나라를 상상하는 것은 지친 땅의 존재에 쉼을 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의 “공평함”이다. 인간세상에서 아웅바둥 키재기 하며 살아가지만 하늘의 무한창대 공평함을 잊지말고 그것을 배우며 살아라는 것이다. 그러니 땅에 사는 우리는 하늘을 동시에 따르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땅의 침착과 무거움, 하늘의 꿈과 비상, 하늘의 공평함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라. 하늘이 높고 위대한 것은 바로 그 공평함에 있다. 그 공평한 하늘은 선인 악인 차별하지 않는다. 미풍이나 태풍, 누구에게나 차별않고 분다. 이런 공평한 하늘은 물론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룰, 법칙, 도, 길에 따라 한다. 그것이 天法道 (천법도)이다. 하늘도 도를 따른다. 그 도는 뭘까? 도법자연이다. 道法自然. 도의 가장 가까운 모습은 자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 먼지, 강, 계곡, 등등. 좀 비약하면 결국 도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